- 김경숙의 NP일기
뉴욕에서 불러보는 사모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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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에서 불러보는 사모곡
엄마. 어머니…. 세상에 이 두 단어보다 더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 주는 단어가 또 있을까?
나는 아들 둘, 딸 넷이 있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4대 독자에 유복자이셔서 아들을 원하는 집안 분위기 속에 나는 네 번째 딸로 태어났지만, 두 분 부모님께 참으로 큰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다.
엄마 말씀에 의하면 내가 밤 9시에 태어났는데, 낮에 태몽을 꾸셨단다. 그 태몽은 귀여운 새끼 호랑이 세 마리가 나무 위에 올라가 놀고 있는 꿈이었다. 꿈에서 깨신 후 “호랑이니까 틀림없이 아들이 나오겠구나” 하고 기뻐하셨는데, 막상 뚜껑을 열어 보니 네 번째 딸인 내가 태어났다고 하셨다.
밤늦게 퇴근하신 아버지께 엄마가 “또 딸이에요” 하시며 미안해하시자,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딸이면 어때? 공부만 시켜 놓으면 되지. 얘는 눈이 초롱초롱한 것이 아주 똑똑하겠는데.”
그러시며 누워 있는 나를 꼭 안아 주셨다고 했다. 엄마가 말씀해 주지 않으셨으면 알지 못했을 일련의 이야기들을 들으며, 나는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부모님께 사랑받고 태어났다는 사실이 내 긍정적인 자아상을 형성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딸은 공부를 안 시켜도 된다는 시절에 태어나신 엄마는 초등학교 2학년까지밖에 다니지 못하셨지만 아주 지혜롭고 현명한 분이셨으며 마음씨 또한 따뜻하셨다.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살던 동네에는 아이가 다섯인 집이 있었는데, 남편이 부인과 아이들을 남겨 두고 가출한 가정이었다. 지금이야 아빠가 돈을 못 벌어오면 엄마가 생활전선에 뛰어드는 세상이지만, 내가 어렸던 시절은 그렇지 못했다.
엄마는 가끔 할머니 몰래 그 집에 국수도 보내고 기름 한 종지를 보내기도 하셨는데, 그 심부름은 언제나 싹싹하게 대답 잘하고 민첩하게 움직이는 내 몫이었다.
내게 심부름을 시키며 엄마는 늘 당부하셨다.
“할머니에게 절대 이야기하면 안 된다.”
어리긴 했어도 ‘우리도 여섯 아이를 키우느라 아버지가 힘드신데, 아무리 어려운 집을 돕는다 해도 할머니가 싫어하시겠지’ 하는 생각은 들었다. 하지만 나는 오빠와 언니들이 모르는 큰 비밀을 엄마와 나만 알고 있다는 생각에 속으로 약간 우쭐하기도 했다.
우쭐하긴 했어도 나는 그 집에 가는 것이 싫었다.
“엄마, 나 그 집 가기 싫어. 그 아줌마는 맨날 울고 있고 애들은 세수도 안 해서 아주 꼬질꼬질 더럽단 말이야. 나 가기 싫어, 엄마.”
그 집 마당 한가운데에는 우물이 있었는데, 어린 마음에도 “왜 쟤네들은 우물물 길어서 세수도 못 하지? 참 이상하다”라고 여러 번 생각했다.
“그러지 말고 갔다 와라. 애들이 굶고 있다는구나.”
나는 하는 수 없이 엄마가 들려주시는 먹거리를 들고 그 집에 부리나케 다녀오곤 했다. 가면 언제나 눈이 빨갛게 짓무르도록 울고 있는 아주머니를 보는 것이 얼마나 싫었던지….
한번은 장을 보러 가는 엄마를 따라갔는데 엄마가 배추와 양념거리를 이상하리만치 많이 사셨다. 왜 이렇게 장을 많이 보셔서 낑낑거리며 힘들게 들고 가시는지 참 의아했는데, 이내 수수께끼가 풀렸다.
엄마가 그 무거운 배추와 양념 보따리들을 들고 간 곳은 바로 그 남편이 가출한 집이었다. 소소한 먹거리야 시어머니 몰래 살짝살짝 나를 통해 보내실 수 있었지만, 큰 먹거리들은 내가 들 수 없으니 직접 시장을 봐서 가져가신 것이었다.
아주머니는 마당에서 무언가를 하다가 깜짝 놀라 일어나셨고, 엄마는 웃으시며 배추와 양념거리를 내려놓으셨다.
“우리 김치거리 사면서 좀 넉넉히 샀어요. 애들하고 김치 담가 드세요.”
그날 놀라던 아주머니의 얼굴과 환하게 웃던 엄마의 얼굴을 나는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선명히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인생의 큰 교훈을 배웠다.
‘아, 어른이 되면 저렇게 우리 엄마처럼 나누며 사는 것이구나….’
나는 “사람은 듣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보고 배운다”라는 말을 수도 없이 들으며 자랐다.
내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 같은 반 친구 진희는 아버지가 미대 교수셨는데 실직을 하셔서 집안 형편이 어렵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 시절에는 수해가 나면 학생들에게 성미쌀을 걷곤 했는데, 나는 학교에 가져갈 성미쌀을 담으며 진희 것까지 함께 챙겨 갔다. 그리고 그녀의 손에 가만히 쥐여 주며 속삭였다.
“네 것까지 내가 가져왔어.”
그러자 그녀의 큰 눈이 더 둥그렇게 커졌었다. 내가 이렇게 기특한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엄마에게 보고 배웠기 때문이겠지….
이 이야기는 가끔 우리 집에 여러 친척분이 모이면 들리던 이야기와도 이어진다.
“효진 엄마는 참 인정이 많아….”
한 분이 말씀하시면 여러 어르신이 고개를 끄덕끄덕하셨다. 어려서는 잘 알아듣지 못했던 그 말의 의미를, 나는 자라면서 이해하게 되었다. 엄마가 참 따뜻한 성품의 소유자였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나는 속으로 참 뿌듯했다.
나는 또래들 중에서도 키가 매우 작은 편이었는데, 학령 아동 선발 과정의 행정 착오로 11월생인 내 생일이 1월생으로 잘못 기록되어 일 년 일찍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같은 나이 아이들 중에서도 작은 내가 한 살 더 많은 아이들과 입학식을 치렀으니, 학급에서 키가 제일 작았다.
부모님은 취학통지서가 나왔으니 그냥 보내 보자고 하셨지만, 너무 작은 내가 혹시 반푼이처럼 자라지는 않을까 걱정이 태산이셨다. 그러다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 엄마는 고민 끝에 학교에 오셔서 담임선생님과 상의를 하셨다.
선생님은 엄마를 만나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경숙이가 키는 작지만 설명하면 잘 알아듣고 따라 하면서 공부도 뒤쪽의 키 큰 아이들보다 훨씬 잘하니까 염려 마세요. 경숙이 똑똑합니다.”
이 이야기 또한 엄마가 직접 해 주신 것이 아니라, 친척 어르신들이 모였을 때 엄마가 깔깔 웃으며 이야기하시는 것을 내가 지나가다 들은 것이었다. 하지만 내게는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아 있다.
내가 고3이 되어 공부하느라 바빴던 어느 여름날, 엄마는 낯선 행상 아주머니 한 분을 데리고 오셨다. 그분은 자개상을 두 개 들고 다니며 파시는 분이었다.
엄마는 내게 점심상을 차리라고 하셨고, 나는 하던 공부를 멈추고 그 알지도 못하는 행상 아주머니를 위해 얼른 점심상을 차려 드렸다. 점심을 맛있게 드신 아주머니는 상값을 많이 깎아 주시며 엄마에게 상을 사라고 하셨다.
그러자 엄마는 말씀하셨다.
“내가 상값을 깎으려고 점심 드시라 한 게 아니에요. 긴 여름날 땡볕에 다니시느라 점심도 못 드셨을 것 같아서 들어오시라 했어요. 점심도 드셨으니 이제 시원한 데서 좀 쉬었다 가세요.”
지나가는 행상 아주머니의 점심까지 챙겨 줄 정도로 엄마는 따뜻한 마음의 소유자셨다. 나는 그런 엄마가 너무 자랑스러웠고, 그런 엄마를 주신 하나님께 엄마가 돌아가신 지 43년이 지난 지금도 감사드린다.
내가 졸업하고 직장 생활을 할 때의 일이다. 그날은 추운 겨울 저녁이었는데 누가 부르는 소리에 현관으로 나가 보니 떡을 파는 행상 아주머니셨다.
“아가씨, 떡 좀 사 주세요. 다 팔고 이제 두 개 남았어요. 이것만 팔면 집에 가려고요.”
날씨도 몹시 추웠지만 아주머니가 너무 간절하게 말씀하시니 내 몸이 자동적으로 반응했다. 얼른 안으로 들어가 지갑을 들고 나와 2천 원을 드리고 떡을 받아 드는 순간, 그 무더웠던 여름날 행상 아주머니께 점심을 대접하던 엄마가 떠오른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우리는 듣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보고 배우니까….
“고맙습니다, 아가씨. 이 돈은 거저 주시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아니에요. 별말씀을요. 안녕히 가세요.”
아주머니가 가신 후, “거저 주신 것이나 다름없다”라고 하신 마지막 말씀이 내게는 큰 울림으로 남았다. 그분이 내가 얼마나 고마웠으면 그렇게 말씀하셨을까.
엄마에게 이런 모습들을 보고 배우며 자란 나는 지금도 쓰레기를 치우러 오시는 분들, 우편물을 가져오시는 분들, 잔디를 깎으러 오시는 분들에게 여름이면 쭈쭈바를 넉넉히 얼려 두고 시원한 물도 준비해 두었다가 만날 때마다 얼른 챙겨 드리곤 한다. 그러면 모두 함박웃음을 지으며 고마워하신다.
가만히 있어도 더운 여름날, 육체노동을 하시는 분들이 얼마나 더우실까를 헤아리는 내 마음은 오래전 여고 시절, 무더운 어느 여름날 행상 아주머니를 집으로 데려오셨던 엄마의 따뜻한 마음을 닮아서가 아닐까 혼자 미소 지어 보기도 한다.
막내딸로, 엄마의 응석받이로 엄마 옆에 딱 달라붙어 엄마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자란 나는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 세상이 끝나 버린 것만 같아 너무 슬펐다. 하지만 아낌없는 사랑을 내게 부어 주신 엄마의 사랑은 내가 세상을 살아가는 데 큰 버팀목이 되었고, 지금까지도 하루도 엄마 생각을 하지 않고 살아온 날이 없을 정도이다.
"엄마, 사랑해요. 그리고 너무너무 많이 보고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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