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두일의 나는간호사
공감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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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살 난 우리 집 아들은 동네에 있는 놀이방에 다닌다. 놀이방은 총 14명의 아이들이 있는데 아들이 그럭저럭 잘 지내서 1년 반을 넘게 다니고 있다.
지난주 목요일 저녁, 퇴근을 하고 아이를 데리러 갔더니 담당 선생님이 나와 개인적으로 면담을 신청했다. 부모로서 처음 불려가는 신세가 되었다. '아들이 무슨 잘못을 해도 크게 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 때문에 엄마 아버지가 학교에 얼마나 많이 왔었는지 생각하니 이젠 내 차례가 되었거니 싶었다.
나와 아들이 선생님과 함께 자리에 앉았다. 선생님은 낮고 분명한 목소리로 있었던 일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놀이방에 다운신드롬 아이가 하나 있는데 며칠 전에 아들이 그 아이에게 '너는 못생겼어'라고 놀려서 주의를 줬다고 한다. 주의에도 불구하고 오늘 또다시 놀렸다는 것이다. 선생님과 나는 아들에게 결코 용납할 수 없는 태도라고 꾸짖었다. 아들이 겁을 먹었는지 금세 눈이 그렁그렁 해졌다.
그날 밤 잠자리에 들려 하니 마음이 아려왔다. 놀림을 당한 아이에게도 미안했고, 장애아의 부모님에게도 미안했다. 자신의 아들이 그렇게 놀림을 당했다는 것을 안다면 얼마나 가슴이 무너지겠는가.
내 아들은 비록 정상아이지만 장애아를 둔 그 부모의 아픔을 나는 느끼고 있었다...
나의 공감 능력이 현저히 떨어졌던 때가 기억이 난다.
1999년, 서울 연남동에 있는 한 친구 집에서 얹혀살았다. 매일 노량진에 있는 학원으로 버스를 타고 통학을 했다. 어느 가을 아침 선선한 공기를 마시며 학원으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정류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정류장까지는 걸어서 5분 정도. 그런데 멀리서 평소와 다른 모습이 펼쳐져 있었다. 각진 검은색 구형 그랜져가 길옆으로 처박혀 있었고 가까이 다가가니 50대 후반의 여성이 차 옆에 널브러져 사지를 떨며 신음하고 있었다. 다행히 핏자국은 보이지 않았다. 쓰러진 아줌마는 몸을 심하게 떨었는데 의식은 있었다. 그분의 눈동자는 주변을 살피고 있었는데 내가 가까이 가니 신음소리를 내며 나를 쳐다보았다. 도와달라는 눈빛이었다. 사고를 낸 사람과 몇 남자들이 사고가 난 장소에 그저 서 있기만 했다. 출혈도 없고 의식도 있으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겠다 싶었다. 다른 사람들도 여럿 현장에 있지 않은가...학원에 늦을까 서둘러 자리를 떴다.
사고를 당했던 아줌마의 눈이 잊히지 않는다.
지난 지금 생각하니 나의 공감능력은 빵점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 때로 돌아간다면 하는 상상을 해본다. 책가방을 내려놓고 그 아줌마의 손을 꼭 잡아주면서 위로를 할 것이다.
"조금만 참으세요. 응급차가 곧 도착할 거예요."
입었던 겉옷도 벗어 덮어주고 싶다. 몸에 온기가 느껴지면 몸을 덜 떨게 될지도 모를 것이다. 응급대원에게 인계될 때까지 그분의 손을 놓지 않을 것이다.
내가 만약 병원 행정을 맡은 사람이라면 공감 능력이 뛰어난 간호사들을 채용할 것이다. 어떻게 공감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을 알 수 있냐고? 요즘 Brain scan을 하면 공감 능력 부분이 얼마큼 크고 활성화되어있는지 다 나온다고 한다. 조금만 투자하면 쉽게 알 수 있다. 기존 직원들은 공감능력 향상 교육을 지속적으로 받게 할 것이다. 공감능력이 뛰어난 자들이 양질의 간호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공감의 시작은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보기다. 극심한 통증을 참지 못해 소리 지르며 예의 없이 구는 사람들을 돌볼 때는 그 사람의 통증을 함께 느껴보려 노력하는 것. 병원에 입원한지 1주일이 지났건만 단 한 사람도 병문 오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는 환자라면 좀 더 친절해 보기. 응급실에서 24시간 넘게 병실 입원을 대기하며 피로감을 느끼는 사람의 괴로움을 느껴보고 위로의 말이라도 한마디 더 해보기.
공감은 내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상황을 마치 겪어본 것처럼 생각하고 느껴서 마치 그 사람의 입장에 서서 말하고 행동하게 되는 행복한 마술이다.
오늘 아이를 데리러 놀이방에 갔는데 좋은 소식을 들었다. 우리 아들이 다시는 그 아이를 놀리지 않고 게다가 친절하기까지 하다고 선생님이 귀띔해 주었다.
부디 공감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되기를 기도한다...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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